밤샘 연구?

7:08 AM

ICRA 논문을 쓰기 위해 이틀 연속으로 연구실에서 밤을 새었다. 한국에서는 새벽에도 불이 가득 켜진 연구소의 모습이 일상이자만, 독일에서는 퇴근시간 이후의 연구소 건물은 암흑 그 자체이다. 처음 독일에 와서 열쇠를 받기 전에 저녁 8시쯤 연구소를 나가는 문이 잠겨있어서 비상벨을 눌렀던 일이 있을 정도로, 이곳 사람들에게 밤에 일하는건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밤을 새며 일하는게 몸에 벤지라 가끔 혼자 밤을 지새우곤 한다. 여기 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밤샌 티도 못내지만...

그럼 한국 대학원생들은 낮에 놀아서 밤을 새는건가? 뭐 그런 낮밤이 바뀐 사람도 있지만, 정상적이라면 낮에 죽어라 일해도 항상 일이 밀려 있어서 데드라인이 닥칠때는 밤을 새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일이 자주 반복되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낮밤이 바뀐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럼, 독일 사람들은 얼마나 일이 없길래 밤새지 않고도 연구가 가능하지? 한국에 비하면 정말 일이 적다. 아니 아예 없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 하루종일 밤새면서까지 보내는 시간 중 여기서 정의하는 연구에 사용하는 시간은 내 경험상 일주일에 일요일 오후 단 몇 시간 뿐이었다. 즉, 주중에 하는 건 연구가 아니라 정말 일이었다.

그 이유는 한국에서 하는 연구과제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연구가 아니라 일이기 때문이다. 처음 과제 제안서부터 마지막 심사 발표까지 연구가 끼어들 틈이 없다. 과제가 끝나가고 어느정도 결과가 나오고 '이제 드디어 논문을 써보자' 라고 하면서 introduction을 쓰려고 할 때, '처음부터 다시 연구를 시작하는 기분은 뭐지?' 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related works 를 쓰려고 할 때, 그제서야 다른 논문들을 찾아서 읽게 되고, 그러고 나면 '아... 이 연구는 예전에 했던 거구나' 아니면 '아... 이 결과는 다른 논문보다 더 안좋구나' 아니면 더 심한 경우는 '아... 이 방법론으로는 안된다는 증명이 벌써 끝났었구나' 라는걸 깨닫게 되고, '그럼 내가 지금까지 뭐했지?' 하는 맨붕을 경험하게 된다.

그럼 과제가 끝나가는 이 시점에 지금까지 한건 무엇일까? 여기서 두 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첫 번째는 '그냥 논문 내지 말고 과제로 마무리 하자' 두 번째는 '아무거나 실어주는 허접한 학회라도 내자' 어떤 경우든 찝찝한 마음은 감출 수 없고, 이런 경험이 누적되면 '과제는 과제일뿐 연구는 따로하자' 라는 현실적으로 가장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마저도 그나마 연구를 갈망하는 마음이 자기를 희생하는 것으로 승화가 가능한 사람이라면...

그럼 한국의 연구과제는 도대체 뭘 하는 걸까? 여기에 대해서는 정말 일년 내내 떠들어도 할 말이 많겠지만, 여기서 굳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요약하자면, '연구를 위한 사전 탐사, 또는 가능성 검토, 또는 실험을 위한 프로토타입 개발' 정도라고 얘기하고 싶다. 물론 이것도 연구를 위한 중요한 단계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과제가 끝나고 나면 전혀 다른 주제의 과제가 시작되고, 담당 학생도 바뀌며, 이 단계를 또 다시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제 연구를 좀 시작해 볼까 하는 타이밍에 주제가 바뀐다. 한국에서 이런 다른 주제를 한 10개정도는 한것 같다. '다양한 좋은 경험' 으로 생각하기에는 '열정페이'만 받고 7년간 인턴 생활만 하는것이라고나 할까? (오늘은 한국 얘기를 하려고 한게 아니라서 더 할 말이 많지만 여기까지 하고...)

그럼 독일의 연구과제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일단 쉽게 말하면, 한국의 연구과제에서 수행하는 일들은 독일에서는 제안서 작성 단계에 해당한다. 펀드마다 다르지만 연구 제안서는 보통 데드라인이 없다. 지원자가 충분히 준비될 때 지원서를 내면 된다. 심사는 보통 6개월이상 걸린다. 마치 저널논문 심사처럼, 발표평가는 없고 대신 전문가들이 충분한 검토시간을 가진다. 여기서 중요한 평가 요소는, '이 제안자가 이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정말 가치가 있는 연구인가?' 이다. 첫 번째 조건에서 그 연구자와 소속된 기관이 과거 수행해온 연구가 중요한 평가지표가 되고, 두 번째 조건에서 연구자가 분석한 관련연구 조사와 그에 바탕한 새로운 제안의 타당성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글을 쓰다보니 이렇게 초등학교에서 배웠을만한 당연한 얘기를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한국에서 경험한 연구과제는 이런 상식에 맞지 않게 진행되었고, 이것이 상식이었는지 조차도 잊어버리고 열심히 일만 하다가 이제서야 이게 상식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럼 독일에서는 연구를 수행할 때 출근해서 뭐하는가? 한국에서 논문 데드라인 1주일전에 책상에 앉아서 "저 1주일간 방해 말아주삼" 이라고 주위에 양해를 구하고 논문보고 실험하고 결과내고 논문쓰고 하는 '연구'를 일년 내내 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내가 말 걸기 전까지는 아무도 뭐 하고 있냐고 묻지도 않고, 과제 미팅하자고 하지도 않으며, 협력기관에 출장갈 일도 없다.
하루종일 혼자 연구하는 시간. 처음에는 적응도 안되고, 어영부영 시간보낼때도 많으며, 연구는 같이 해야 하는거 아냐?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여기에 적응이 되면, 비슷한 연구하는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미팅도 생기고, 교수한테도 먼저 찾아가게 되며, 길게 연구에 집중하는 법도 터득하게 된다.

한 가지 주제에 긴 시간을 몇 달을 고민하다보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일들을 찾아서 많이 하게 된다. 논문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법, 아이디어를 적어놓고 관리하는 법, 그 아이디어들을 연구문제로 구체화 하는 법, 앞에로 쓸 논문을 미리 설계하는 법 등등... 이런것들이 쌓이게 되면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지만 혼자 커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게 되고, 그럼 새로운 학생들에게 그 주제를 주고 가르쳐주고 같이 논문을 쓰게 된다.

이전 독일 석사과정에 대한 글에 맨토-맨티 시스템을 비유해 주신 분이 계셨다. 연구에 있어서 멘토-멘티란 그 연구 주제가 이어지거나 파생되어야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에게 주제의 선택이 가능해야 하며, 그 주제를 제안하고 이를 서포팅 하는 펀드가 있어야 한다. 즉, 연구설계의 주체는 연구자가 되어야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예상 연구 결과를 수치로 명시하는 과제 제안서. 그리고 그 결과를 달성하지 못하면 fail 이라고 연구자를 평가하는 한국의 국가 연구과제. 이를 이전 글에 썼던 독일 시스템으로 비유하자면, '그 연구를 해본적 없는 박사 학생이 디자인한 석사연구 주제'와 처지와 비슷하다. 그리고는 결국 처음부터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비현실적인 또는 연구로서 의미가 없는 지표로 그 과제를 평가하고 그걸로 마무리다. 연구는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지 않은채로 말이다.

독일 연구자는 왜 밤을 새지 않는가? 이렇게 장기적인 연구의 마라톤 길에서는 중간에 무리해서 스퍼트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독일연구자 마인드로 다시 묻자면, 왜 밤을 새서 연구를 해야 하는가?

원문게시일: 2015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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